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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 클럽 드 푸트볼(스페인어 발음: [레알 마드리드 축구단])은 흔히 레알 마드리드(Royal Madrid)로 불리는 스페인의 프로 축구 클럽이다.


1902년 3월 6일 마드리드 축구 클럽으로 창단된 이 클럽은 창단 때부터 전통적으로 흰색 홈 키트를 착용하고 있다. real이라는 단어는 스페인어로 "royal"을 뜻하며 1920년 알폰소 13세 왕에 의해 엠블럼에 왕관과 함께 클럽으로 수여되었다. 이 팀은 1947년부터 마드리드 시내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81,044 용량의 경기장에서 홈경기를 치렀다. 대부분의 유럽 스포츠 단체들과는 달리, 레알 마드리드의 멤버들은 이 클럽의 역사를 통해 이 클럽을 소유하고 운영해왔다.


이 클럽은 2019년 38억 유로(42억 달러) 규모로 추정되었으며, 2018년 연간 매출 7억5090만 유로로 세계에서 가장 수입이 많은 축구 클럽이었다.[6][7] 클럽은 세계에서 가장 널리 후원받는 팀 중 하나이다.[8] 레알 마드리드는 1929년 창단 이래 한번도 최고 부대에서 밀려난 적이 없는 라 리가 3개 창단 멤버 중 한 명이다. 이 클럽은 바르셀로나와 함께 하는 엘 클라시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함께 하는 엘 데르비 등 많은 오랜 라이벌들을 보유하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는 1950년대에 스페인 축구와 유럽 축구에서 모두 주력으로 자리매김하여 유럽컵 5회 연속 우승과 결승 7회까지 진출했다. 이 성공은 그 클럽이 7년이라는 공간에서 5번 우승한 리그에서 재현되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페렌푸스카스, 프란시스코 겐토, 레이몬드 코파 등 선수들로 구성된 이 팀은 스포츠계 일각에서 역대 최고의 팀으로 평가받고 있다.[9][10][11] 국내 축구에서, 클럽은 64개의 트로피를 거머쥐었고, 33개의 라 리가 우승, 19개의 코파 델 레이, 10개의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0개의 코파 에바 두아르테, 그리고 코파 데 라 리가 우승했다.[12] 유럽 및 전 세계 대회에서, 이 클럽은 26개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유럽컵/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기록 13개, UEFA컵 2개, UEFA 슈퍼컵 4개. 국제 축구에서, 그들은 7개의 클럽 세계 챔피언을 달성했다.[주 1]


레알 마드리드는 2000년 12월 11일[14년] 20세기의 FIFA 클럽으로 인정받았으며, 2004년 5월 20일 FIFA 100주년 기념훈장을 받았다.[15] 클럽은 2010년 5월 11일 IFFHS에 의해 20세기 최고의 유럽 클럽상을 받기도 했다. 2017년 6월, 챔피언스리그에 복귀한 최초의 클럽으로 성공하였고, 2018년 5월 3회 연속 우승하여 UEFA 클럽 랭킹 1위 자리를 확장하였다.


레알 마드리드의 기원은 케임브리지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교 졸업생 몇 명이 포함된 인스티튜시온 리브르 드 엔세냐자의 학자들과 학생들에 의해 마드리드에 축구가 소개되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소시에다드) 1897년 스카이 축구는 일요일 아침에 몬클로아에서 경기하면서 마드리드에 본부를 둔 유일한 축구였기 때문에 흔히 라 소시에다드(The Society)로 알려져 있다. 1900년 멤버들 간의 갈등으로 인해 일부 멤버들은 탈퇴하고 새로운 클럽인 누에바 소시에다드 드 풋볼(New Society of Football)을 창단하여 스카이 풋볼과 차별화되었다. 반대자들 중에는 최초의 레알 마드리드 대통령으로 인정받은 훌리안 팔라시오스와 후안 파드로스와 카를로스 파드로스가 있었는데, 후안 파드로스는 레알 마드리드의 형제와 미래의 대통령이 되었다. 1901년에 이 새로운 클럽은 마드리드 축구 클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1902년 구조조정에 따라 스카이는 "새로운 풋볼 클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8][19][20] 1902년 3월 6일 후안 파드로스가 주재하는 새로운 이사회가 선출된 후, 마드리드 축구 클럽이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창단 3년 후인 1905년 마드리드 FC는 스페인컵 결승전에서 애슬레틱 빌바오를 꺾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 클럽은 1909년 1월 4일 아돌포 멜렌데즈 클럽 회장이 스페인 FA의 창립 협약에 서명하면서 왕립 스페인 축구 연맹의 창단 측 중 하나가 되었다. 그 팀은 경기장 사이를 이동한 후 1912년에 캄포 드 오도넬로 이적했다.[21] 1920년 알폰소 13세가 레알(Royal)의 칭호를 구단에 부여한 후 클럽의 이름이 레알 마드리드로 바뀌었다.[22]


1929년에 최초의 스페인 축구 리그가 창설되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지난 경기까지 리그 첫 시즌을 이끌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바르셀로나에게 준우승을 끝냈다는 것을 의미했다.[23] 레알 마드리드는 1931–32 시즌에 리그 첫 우승을 차지하였고, 이듬해에도 우승을 유지하여 두 번 우승한 최초의 팀이 되었다.[24]


1931년 4월 14일 제2의 스페인 공화국이 도래하면서 클럽은 레알이라는 타이틀을 잃게 되었고 다시 마드리드 축구단이라는 이름으로 돌아갔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축구는 계속되었고, 1943년 6월 13일 마드리드는 프랑코 장군을 기리기 위해 개명된 코파 델 레이의 준결승 2차전에서 바르셀로나를 11 대 1로 이겼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예스테는 1945년 레알 마드리드의 대통령이 되었다.[30] 그의 재임 하에 스페인 내전 피해로 클럽, 경기장 베르나베우, 훈련 시설인 시우다드 데포르티바는 재건되었다. 게다가 1950년대에 전 레알 마드리드 아마추어스 선수 미겔 말보는 오늘날 라파브리카로 알려진 레알 마드리드의 청소년 학원을 설립했다. 1953년부터는 해외파 세계적인 선수들과 계약하는 전략을 펼쳤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다.


1955년 프랑스의 스포츠 저널리스트이자 레퀴페의 편집자인 가브리엘 하노트가 제안한 아이디어에 따라 베르나베우, 베드리그난, 구스타v 세베는 유럽 전역의 챔피언팀들을 위한 토너먼트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결국 오늘날 UEFA 챔피언스 리그로 알려지게 되었다.[32] 레알 마드리드가 스페인 축구와 유럽 축구에서 모두 주력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베르나베우의 지도 아래였다. 이 클럽은 1956년부터 1960년 사이에 유럽 컵에서 다섯 번 연속 우승했는데, 1960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상대로 한 7-3 햄프든 파크 결승전이 포함되었다.[31] 이러한 다섯 번의 연속적인 성공 후에 레알은 영구적으로 오리지널 컵을 수여받았으며 UEFA 명예의 배지를 달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다.[33]


이 클럽은 1966년 같은 국적 선수들로만 구성된 팀이 결승전에서 파르티잔 베오그라드를 2-1로 꺾고 6번째로 유러피언 컵에서 우승했다.[34] 이 팀은 예예로 알려지게 되었다. '예예'라는 이름은 비틀즈의 노래 'She Loves You'에서 4명의 멤버들이 마르카를 위해 포즈를 취하고 비틀즈를 흉내낸 후 "Ye-ye" 코러스에서 따왔다.[35] 예예 세대는 1962년[36년]과 1964년 유럽컵 준우승이기도 했다.[34] 1970년대에 레알 마드리드는 리그 우승 5회, 스페인 컵 3회를 우승했다.[37] 클럽은 1971년에 UEFA 컵 위너스 컵 결승전을 처음으로 치렀고 영국팀 첼시에게 2 대 1로 졌다.[38] 1978년 7월 2일, 아르헨티나에서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 동안 클럽 회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사망했다. FIFA는 대회 기간 동안 그를 기리기 위해 3일간의 애도 기간을 정했다.[39] 이듬해 구단은 전 회장을 추모하기 위해 트로페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초판을 조직했다.


1980년대 초, 레알 마드리드는 국내파 스타들의 새로운 코호트가 클럽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리가의 타이틀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40][41] 스페인 스포츠 저널리스트 훌리오 세사르 이글레시아스는 이 세대에 멤버 중 한 명인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에게 붙여진 별명으로부터 유래한 라 퀸타 델 비테레("Vulture's Cohort")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나머지 4명의 멤버는 마누엘 산치스, 마르틴 바스케스, 미겔 파데자, 그리고 미겔 파데자였다. 5명의 축구선수들은 모두 레알 마드리드의 청소년 학원을 졸업했다.[40][41] 라 퀸타 델 비트레(1986년 파르데자가 자라고자로 떠날 때 4명으로 줄임)와 골키퍼 프란시스코 부요, 우백 미겔 포르란 첸도, 멕시코 공격수 우고 산체스 등 쟁쟁한 선수들이 주축이 된 레알 마드리드는 1980년대 후반 스페인과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팀 중 하나를 차지하며 유럽축구연맹(UEFA)컵 5회 우승컵을 차지했다.스페인 컵 1개, 스페인 슈퍼컵 3개.[40][41] 1990년대 초, 마르틴 바스케스, 에밀리오 부트라그뇨, 미첼이 클럽을 탈퇴한 후 라 퀸타 델 비뜨레가 갈라졌다.


1996년 로렌조 산츠 대통령은 파비오 카펠로를 감독으로 임명했다.[42] 비록 그의 임기는 한 시즌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레알 마드리드는 리그 챔피언으로 선언되었고, 프레드라그 미자토비치, 다보르, 클라렌스 세도르프, 로베르토 카를로스, 골키퍼 보도 일그너 같은 선수들은 라울, 페르난도 히에로, 페르난도 레돈도 같은 선수들을 강화하기 위해 클럽에 도착했다. 그 결과 레알 마드리드(1997년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추가)는 마침내 32년간의 유럽컵 기다림을 끝냈다: 1998년 쥬프 하이네크스 감독 밑에서 그들은 미자토비치의 골로 결승에서 유벤투스를 1-0으로 꺾었다.[43]


1999년 11월 비센테 델 보스케가 감독을 맡았다. 1999-2000년의 마지막 시즌 동안, 그 선수단은 여전히 페르난도 히에로, 페르난도 레돈도, 로베르토 카를로스, 라울 곤살레스와 같은 나이든 참전용사들이 이끌었다. 레알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스티브 맥마난과 니콜라스 아넬카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온 것을 뒷받침하는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구티, 이케르 카시야스의 신진 선수들과 현지 실력자 미첼 살가도, 이반 헬게라 등을 추가했다. 델 보스케의 첫 번째 시즌에서 레알은 결승전에서 발렌시아를 3-0으로 이기고 모리엔테스, 맥마나만, 라울의 골로 챔피언스리그에서 8번째로 우승했다.[44] 이 승리는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성공적인 기간의 시작을 알렸다.


2000년 7월 플로렌티노 페레즈는 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었다.[46] 그는 2억 7천만 유로의 부채를 탕감하고 클럽의 시설을 현대화하겠다고 캠페인에서 다짐했다. 그러나 페레즈를 승리로 이끈 1차 선거 공약은 바르셀로나에서 루이스 피고를 영입한 것이었다.[47] 이듬해, 구단은 훈련장을 개조하고, 매년 여름 세계적인 스타인 지네딘 지단, 호날두, 루이스 피고, 데이비드 베컴, 파비오 칸나바로와 계약을 맺음으로써 갈란티코스 팀을 조립하는 데 돈을 썼다.[48] 2002년 UEFA 챔피언스 리그와 인터콘티넨탈 컵에서 우승한 데 이어 2003년 라 리가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도박이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2003년 리가 타이틀을 거머쥔 지 며칠이 지나자 논란에 휩싸였다. 첫 번째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결정은 Pérez가 승리하는 코치 Vicente del Bosque를 경질했을 때 나왔다.[50] 마드리드 주장 페르난도 히에로를 포함해 12명 이상의 선수들이 클럽을 떠났고, 수비형 미드필더 클로드 메이클레는 클럽에서 가장 낮은 연봉의 선수 중 한 명이 되는 것에 항의하여 훈련에 참가하기를 거부했고, 그 후 첼시로 이적했다.[51] 지단은 "일반적으로 우승팀을 절대 바꾸지 말라는 규칙일 때 떠나는 선수들이 많다"고 말했다.[52] 새롭게 임명된 카를로스 케이로스 감독과 함께 레알 마드리드는 레알 베티스를 상대로 힘든 승리를 거둔 후 천천히 국내 리그를 시작했다.[52]


2005-06 시즌은 줄리오 침티스타(2400만 유로), 호비뉴(3000만 유로), 세르히오 라모스(2700만 유로) 등 여러 새로운 서명의 약속으로 시작되었다.[53]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는 2005년 11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바르셀로나의 손에 0-3으로 패하는 등 일부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54] 마드리드의 감독 완데를리 Luxem버고는 다음 달에 해고되었고 그의 후임은 후안 라몬 로페즈 카로였다.[55] 레알 자라고자에게 6 대 1로 코파 델 레이 8강 1차전 패한 후 간단한 폼 복귀가 갑자기 중단되었다.[56] 얼마 지나지 않아 레알 마드리드는 4년 연속, 이번에는 아스널의 손에 의해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했다. 2006년 2월 27일 플로렌티노 페레즈는 사임했다.


라몬 칼데론은 2006년 7월 2일 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그 후 파비오 카펠로를 새 코치로, 프레드라그 미자토비치(Predrag Mijatovich)를 새 스포츠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레알 마드리드는 2007년 4년 만에 처음으로 리가 우승을 차지했지만, 카펠로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운동 막바지에 사퇴했다.[58] 6월 17일, 레알은 베르나베우에서 말로르카와 맞붙었고, 다른 타이틀전수 바르셀로나와 세비야는 각각 김나스트 데 타라고나와 비야레알과 맞붙었다. 전반전 레알은 0 대 1로 뒤졌고 바르셀로나는 타라고나에서 0 대 3으로 앞섰다. 하지만 최근 30분 동안 3골을 넣으며 마드리드가 3 대 1로 승리했고 2003년 이후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009년 6월 1일 플로렌티노 페레즈는 레알 마드리드의 대통령직을 되찾았다.[60] 페레즈는 첫 임기에 갈란티코스 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밀라노로부터 5천 6백만 파운드의 기록적인 (파운드의 스테롤링) 합계를 받고 카카를 매입한 다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부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8천만 파운드로 매수하여 다시 기록을 경신하였다.[62]


호세 모리뉴 감독은 2010년 5월 감독을 맡았다.[63][64] 2011년 4월, 사상 처음으로 단 18일의 기간 동안 4개의 클라시코가 연주될 때 드문 일이 일어났다. 4월 17일 리가 유세(양 측의 페널티 골로 1 대 1로 종료), 코파 델 레이 결승(1 대 0으로 종료), 4월 27일과 5월 2일 바르셀로나와의 2개 다리의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총 3 대 1로 졌다).[65]


2011-12년 라 리가 시즌에는 레알 마드리드가 리그 역사상 32번째로 라 리가 우승을 차지하여, 한 시즌에 100점, 총 121골, 골득실 +89, 원정 16승 등 수많은 클럽 레벨의 기록으로 시즌을 마감하기도 했다.[66] 같은 시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스페인 리그 역사상 가장 빠른 100골을 기록한 선수가 된다. 92경기에서 101골을 터뜨린 호날두는 105경기에서 100골을 터뜨린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 페렌크 푸스카스를 제쳤다. 호날두는 1년 만에 개인 골로 클럽마크(60)를 새로 세웠고, 한 시즌 19개 팀 모두를 상대로 한 역대 첫 골을 터뜨렸다.[67][68]


레알 마드리드는 2012-13시즌부터 슈페르코파 데 에스파냐를 따내며 원정 골로 바르셀로나를 꺾었지만 리그 경쟁에서 2위를 차지했다. 이번 시즌의 주요 이적은 토트넘 홋스퍼로부터 3300만 파운드의 유료로 루카 모드리치와 계약하는 것이었다. 페레즈는 2013년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실망스러운 연장전 패배를 당한 뒤 시즌 말 호세 모리뉴의 퇴장을 "상호 합의"로 발표했다.


2013년 6월 25일 카를로 안첼로티는 모리뉴의 뒤를 이어 3년 계약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이 되었고, 지네딘 지단은 그의 조수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72] 2013년 9월 1일, 오랫동안 기다려온 토트넘 홋스퍼의 가레스 베일의 이적이 발표되었다. 웨일스맨의 이적료는 약 1억 유로로 추정되며, 새로운 세계 기록 서명이었다고 한다.[73] 안첼로티의 클럽에서의 첫 시즌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코파 델 레이를 우승했고, 베일은 바르셀로나와의 결승전에서 우승했다.[74] 5월 24일, 레알 마드리드는 2014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도시 라이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꺾고 2002년[75년] 이후 첫 유럽 우승을 차지했으며, "라 데시마"라고 알려진 유럽컵/챔피언 리그 우승을 10번 차지한 최초의 팀이 되었다.[76]


레알 마드리드는 2014년 챔피언스리그 우승 후 골키퍼 케일러 나바스와 미드필더 토니 크로오스, 공격형 미드필더 제임스 로드리게스와 계약했다.[77] 클럽은 2014 UEFA 슈퍼컵에서 클럽의 79번째 공식 트로피인 세비야를 상대로 우승했다.[78] 2014년 하계 이적 창구 마지막 주 동안 레알 마드리드는 지난 시즌의 성공에 중요한 열쇠인 사비 알론소를 바이에른 뮌헨에, 앙헬 디 마리아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팔았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내가 책임자라면 다른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반면 카를로 안첼로티는 "영점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시인하는 등 구단의 이 같은 결정은 논란에 휩싸였다."[79][80]


레알 마드리드는 2014-15 라 리가 시즌을 천천히 시작한 뒤 바르셀로나, 리버풀과의 경기를 포함해 22연승을 달리며 2005-06 시즌 프랑크 리자르의 바르샤가 세운 종전 스페인 기록인 18연승을 넘어섰다.[81] 2015년 개막전에서 발렌시아에게 패하면서 연승은 막을 내렸고, 이로써 클럽은 24연승을 달리며 세계 신기록을 달성하는 데 2점 모자랐다.[82] 2015년 5월 25일 안첼로티가 해임되기 전 챔피언스리그(결승전에서 유벤투스에게 패)와 코파 델 레이를 유지하지 못했고, 리그 우승(챔피언스 바르셀로나보다 2점 뒤진 곳)도 놓쳤다.[83]


2015년 6월 3일, 라파엘 베니테스는 레알 마드리드의 새 감독으로 확정되어 3년 계약을 맺었다.[84] 레알 마드리드는 11일(현지시간) 세비야에서 3-2로 패할 때까지 리그에서 무패 행진을 이어갔다. 이로써 바르셀로나와의 시즌 첫 클라시코에서 0-4로 패했다. 32세의 코파 델 레이 라운드에서 레알은 데니스 셰리셰프의 부적격 선수를 1-3으로 이기고 카디즈를 상대로 첫 번째 다리의 승리를 거두었고, 그 결과 두 번째 다리는 취소되고 레알은 실격되었다.[85] 베니테스는 2016년 1월 4일 지지자들에 대한 비호감, 선수들에 대한 불쾌감, 상위 팀들에 대한 좋은 결과 도출에 실패했다는 의혹으로 인해 직위해제되었다.[86]


2016년 1월 4일, 지네딘 지단의 첫 수석 코치 승진과 함께 베니테스의 퇴장이 발표되었다.[87] 지단 아래에서, 레알은 2015–16 라 리가에서 챔피언 바르셀로나에 불과 1점 뒤진 2위로 경기를 마쳤다.[88] 5월 28일, 레알 마드리드는 11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여, 이 대회 최다 우승 기록을 늘렸으며, 이 성과는 "라 운데시마"라고 불린다.


레알 마드리드는 2016 UEFA 슈퍼컵 우승을 계기로 클럽을 책임지는 지단의 첫 정규시즌이 될 2016–17 캠페인을 시작했다.[90] 2016년 12월 10일, 마드리드는 35번째 스트레이트 경기에서 무실점으로 승리하여 클럽 신기록을 세웠다.[91] 2016년 12월 18일, 2016년 FIFA 클럽 월드컵 결승에서 마드리드는 일본 클럽 가시마 앤틀러스를 4 대 2로 물리쳤다.[92] 2017년 1월 12일 세비야에서 3-3 무승부를 기록한 마드리드의 무패 기록은 40경기까지 연장되어 바르셀로나의 전 시즌 무패 기록 39경기를 갈아 치웠다.[93] 그들의 무패행진은 사흘 뒤 라 리가에서 열린 세비야와의 원정경기에서 1-2로 패한 후 끝났다.[94] 그해 5월, 마드리드는 2016–17 라 리가에서 5년 만의 우승 기록인 33번째로 우승했다.[95] 6월 3일 유벤투스를 상대로 한 클럽 챔피언스 리그 결승 우승으로 레알 마드리드는 UEFA 챔피언스리그 시대에 타이틀 방어를 성공시킨 최초의 팀이 되었으며, 이 대회가 유럽컵으로 알려진 1989년과 1990년 밀란 이후 처음으로 이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96][97] 레알 마드리드의 우승은 12위로 기록을 연장했고, 4년 만에 세 번째였다. 이 업적은 "라 듀오데시마"로도 알려져 있다.[98] 2016–17시즌은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우승 트로피 측면에서 가장 위대한 캠페인이었다.[99]


레알 마드리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열린 2017 UEFA 슈퍼컵 2-1에서 우승했다.[100] 5일 후 레알 마드리드는 2017년 슈퍼코파 데 에스파냐 1차전에서 바르셀로나를 캠프 누에서 꺾은 뒤 2-0으로 승리, 엘 클라시코전에서 바르셀로나의 24경기 연속 득점 기록을 마감하고, 합계 5 대 1로 경기를 마쳤다.[101] 2017년 12월 16일, 레알은 2017년 FIFA 클럽 월드컵 결승에서 브라질 클럽 그뤼미오를 1-0으로 꺾고 우승컵을 차지한 최초의 클럽이 되었다.[102] 레알 마드리드 역시 2018년 UEFA 챔피언스리그 3연패를 달성하여 대회 개시 이후 UEFA 챔피언스리그 3연패를 달성한 최초의 클럽이 되었으며, 1970년대 바이에른 뮌헨 이후 유럽 대회에서 3연패를 달성한 최초의 팀이 되었다. 결승전에서 우승한 지 불과 5일 후인 5월 31일, 지단은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직을 사임하면서, 클럽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출발의 근거로 들었다.[103][104]


6월 12일, 레알 마드리드는 스페인 대표팀의 감독인 줄렌 로페게티를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 2018년 FIFA 월드컵 이후 감독이 공식화 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하지만 스페인 대표팀은 대회 하루 전 로페게티 감독이 구단 측과 사전협상을 벌였다고 밝히며 경질했다.[105][106][107] 그 후, 클럽은 2018년 여름, 1억 유로를 받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유벤투스에 매각하는 등 공격적으로 팀을 재편성하기 시작했다.[108] 연이은 부진과 팀 패배로 로페게티는 해임되고, 당시 카스티야 코치였던 산티아고 솔라리로 교체되었다.[109] 2018년 12월 22일, 레알 마드리드는 2018년 FIFA 클럽 월드컵 결승에서 알 아인에게 4 대 1로 이겼다. 그들의 우승으로, 레알 마드리드는 4개의 타이틀로 클럽 월드컵의 완전한 우승자가 되었다. 그들은 FIFA가 인터콘티넨탈 컵을 FIFA 클럽 월드컵의 전신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총 7번의 대회 동안 세계 챔피언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들은 또한 3연속 우승 기록을 연장했다.[110] 2019년 3월 11일, 레알 마드리드는 지단을 클럽의 감독으로 복직시켰다.


대부분의 홈 경기 동안 경기장의 대부분의 좌석은 시즌 티켓 소유자가 차지하고 그 중 65,000명이 차지한다.[160] 시즌 티켓 소지자가 되려면 먼저 사회 구성원, 즉 클럽 회원이어야 한다. 이 클럽은 회원 외에도 스페인과 전 세계에 1800여 페냐(공식, 클럽 제휴 지지자 모임)를 두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는 스페인 축구에서 역대 두 번째로 높은 평균 관중을 보유하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7만 4천 명이 넘는 팬들을 베르나베우로 끌어모으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는 2017년 4월 페이스북을 통해 1억 명의 팬을 확보한 최초의 스포츠 팀(그리고 최초의 브랜드)이다.[161][162]


레알 마드리드의 하드코어 지지자들은 이른바 울트라서(Ultras Sur) 지지자들, 즉 간단히 울트라(Ultras) 지지자들이다. 이들은 바르셀로나의 하드코어 지지층인 보이소스 누이스와 비슷한 극우 정치로 유명하다. 울트라 소르족은 다른 우익 단체, 특히 라치오 이리두치빌리 팬들과 동맹을 맺고 있으며, 좌익 단체와도 동맹을 맺었다. 여러 차례 상대 선수를 인종적으로 학대해 왔고, UEFA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163][164] 플로렌티노 페레즈는 스스로 베르나베우에서 울트라스를 금지시키고 일반 대중에게 자리를 배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베르나베우 신자들 중 일부에서 논란이 되었는데, 그 결과 게임의 활기찬 분위기가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165][166] 울트라스는 그 후 베르나베우 밖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복직과 경기장 출입을 요구했다.[167]


마드리드 주장 세르히오 라모스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FIFA 클럽 월드컵 결승전 상대인 산 로렌조를 고집한 데 대해 "4강전에서 우리는 마라케시 응원단의 사랑을 알아차렸고 우리는 집에서 경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이 팀의 위대함을 요약한다. 마드리드는 신의 팀이자 세계의 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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