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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tbol Club 바르셀로나(카탈란 발음: [fubˈbɔl ˈklub bəɾslonələˈl]lllllsl blubl (lenl soundllistllonl)l thisl andlˈlɾlAboutl (nə(이 소리리스트에 대하여)]는 스페인 카탈로니아 주 바르셀로나에 본부를 둔 스페인의 프로 축구 클럽이다.
1899년 조안 감퍼가 이끄는 스위스, 스페인, 영국, 카탈로니아 축구 선수 그룹에 의해 창단된 이 클럽은 카탈로니아 문화와 카탈로니아의 상징이 되었고, 따라서 "Més Que un Club" ("클럽보다 더 많이"라는 모토가 되었다. 다른 많은 축구 클럽과 달리, 지지자들은 바르셀로나를 소유하고 운영한다. 40억6000만 달러 규모의 세계 4위, 매출액 기준으로는 세계 2위 축구단이며, 연간 매출액은 6억9040만 유로에 이른다.[2][3] 바르셀로나 공식 국가는 자우메 피카스와 요제프 마리아 에스피나스가 쓴 "칸델 바샤"이다.[4]
국내에서는 바르셀로나가 74개의 트로피를 거머쥐었으며, 라 리가 26개, 코파 델 레이 30개, 에스파냐 13개, 코파 에바 두아르테 3개, 코파 데 라 리가 2개 등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국제 클럽 축구에서, 이 클럽은 20개의 유럽 및 전 세계 타이틀을 획득했다; 5개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4개의 UEFA 컵 우승, 5개의 UEFA 슈퍼컵 공동 기록, 3개의 인터시티 페어컵, 3개의 FIFA 클럽 월드컵.[5] 바르셀로나는 1997년, 2009년, 2011년, 2012년, 2015년[6][7] 국제축구연맹 축구역사통계클럽 세계 랭킹 1위에 올랐으며 현재 UEFA 클럽 랭킹 2위를 차지하고 있다.[8] 이 클럽은 레알 마드리드와 오랜 라이벌 관계를 맺고 있으며, 두 팀 간의 경기를 엘 클라시코라고 부른다.
바르셀로나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후원받는 팀 중 하나이며, 이 클럽은 스포츠 팀들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소셜 미디어를 가지고 있다.[9][10]바르셀로나 선수들은 요한 크루이프 등 수상자와 FIFA 올해의 선수상 기록(7)을 비롯해 호나우두, 로마리오, 호나우지뉴, 리발도 등 수상자들이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 2010년 클럽 유소년 아카데미(리오넬 메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사비)를 거쳐 온 3명의 선수가 FIFA 발롱도르상 세계 최고 선수로 선정돼 같은 축구학교 출신 선수들에게는 유례없는 위업이었다. 게다가, 이 클럽을 대표하는 선수들은 유럽 골든 슈 어워드의 기록적인 수(8)를 획득했다.
바르셀로나는 1929년 창단 이래 한번도 최고 부대에서 밀려난 적이 없는 프리메라 디비시온 3개 창단 멤버 중 한 명이다. 2009년 바르셀로나는 라 리가, 코파 델 레이, UEFA 챔피언스 리그로 구성된 대륙 트레블을 우승한 최초의 스페인 클럽이 되었으며, 스페인 슈퍼컵, UEFA 슈퍼컵, FIFA 클럽 월드컵에서도 우승함으로써 1년 만에 6개 대회 중 6개를 우승한 스페인 축구 클럽도 되었다.[11] 2011년, 클럽은 다시 유럽 챔피언이 되어 5개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펩 과르디올라로 불과 4년 만에 14개의 트로피를 거머쥔 바르셀로나 팀은 이 스포츠계에서 역대 최고의 팀으로 평가받고 있다.[12][13][14] 2015년 6월 6일 챔피언스리그 5번째 우승으로 바르셀로나는 유럽 클럽 사상 처음으로 대륙 트레블을 두 번 달성했다. 2018년 11월 바르셀로나는 연봉이 10만 파운드(약 13.8m)를 넘는 최초의 스포츠 팀이 되었다.
1899년 10월 22일, 한스 갬퍼는 로스 데포르테스에 축구 클럽을 결성하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을 선언하는 광고를 냈다; 긍정적인 반응은 11월 29일, 기미나시오 솔레에서 회의를 가졌다. 참석 선수 11명 - 월터 와일드(클럽 초대 감독), 루이즈 도소, 바르토메우 테라다스, 오토 쿤즐, 오토 마이어, 엔릭 듀칼, 페레 카봇, 칼레스 푸졸, 요제프 로베트, 존 파슨스, 윌리엄 파슨스 - 풋볼 클럽 바르셀로나(Foot-Ball Club 바르셀로나)가 태어났다.
FC 바르셀로나는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와 코파 델 레이에서 경합을 벌이며 지역컵과 국가컵에서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1902년 클럽은 첫 트로피인 코파 마카야를 획득하고, 제1회 코파 델 레이에 참가하여 결승전에서 비즈카야에게 1-2로 졌다.[19] 1908년, 현재 Joan Gamper로 알려진 한스 갬퍼는 1905년 Campionat de Catalunya 이후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후, 바르셀로나를 멸종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로 클럽 회장이 되었다. 그는 회의에서 "바리케인은 죽을 수도 없고 죽어도 안 된다. 노력하려는 사람이 없다면 이제부터 내가 클럽을 운영할 책임을 지겠다.1908년부터 1925년까지 5차례에 걸쳐 총 25년간 클럽 회장을 맡았다.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바샤가 자신의 경기장을 매입하여 안정적인 수입을 창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21]
1909년 3월 14일, 8,000명의 수용력을 가진 경기장인 캠프 데 라 인두스트리아로 이적하였다. 그들의 새로운 환경을 기념하기 위해, 그 클럽은 다음 해에 로고 콘테스트를 실시했다. 칼스 코마말라가 이 대회에서 우승했고, 그의 제안은 현재까지도 클럽이 약간의 사소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입고 있는 최고가 되었다.[22]
새로운 경기장과 함께 바르셀로나는 피레네즈컵의 창단식에 참가하였는데, 당시 바르셀로나는 랭귀도크, 미디, 아퀴테인(남프랑스), 바스크 컨트리, 카탈로니아 등의 최고 팀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마르카 히스파니카 지역의 전 멤버였다. 그 대회는 그 시대에 가장 권위 있는 대회였다.[23] 1910년 창단년부터 1913년까지 바르셀로나는 이 대회에서 4회 연속 우승했다. 칼레스 코마말라는 아메차주라, 잭 그린웰과 함께 측면의 매니지먼트를 맡아 4번 우승자의 핵심 역할을 했다. 후자는 1917년에 이 클럽의 첫 전임 감독이 되었다.[24] 마지막 판은 1914년 바르셀로나 시에서 열렸는데, 이 판은 지역 라이벌 에스파냐올이 이 상을 받았다.[25]
같은 기간 동안 클럽은 공식 언어를 카스티야어에서 카탈로니아어로 바꾸고 점차 카탈로니아 정체성의 중요한 상징으로 진화했다. 많은 팬들에게, 그 클럽에 참여하는 것은 그 클럽의 집단 정체성의 일부가 되는 것과 더 관련이 없었다.[26] 1917년 2월 4일, 클럽은 1913년부터 1928년까지 활약한 라몬 토랄바를 기리기 위해 첫 증언전을 열었다. 이 경기는 바르셀로나가 6-2로 이긴 지역 팀 테라스와의 경기였다.[27]
갬퍼는 동시에 더 많은 클럽 회원을 모집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였고, 1922년까지 클럽은 2만 명 이상을 보유하여 새로운 경기장의 자금 조달을 도왔다. 그 후 클럽은 같은 해에 출범했던 새로운 레스코테스로 이적했다.[28] 레스코테스의 초기 수용력은 3만 명이었으며, 1940년대에는 6만 명으로 확대되었다.[29]
갬퍼는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초의 풀타임 감독으로 잭 그린웰을 영입했다. 이 고용 이후, 그 클럽의 운명은 경기장에서 향상되기 시작했다. 감퍼가 이끄는 시대에는 바르셀로나가 캄피오나츠 데 카탈루냐 11회, 코파 델 레이 6회, 피레네 컵 4회를 우승하며 첫 '황금시대'를 누렸다
1925년 6월 14일,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를 반대하는 자발적인 반응으로 경기장의 군중은 왕립 행진곡을 조롱했다. 보복으로 지상은 6개월 동안 폐쇄되었고 감퍼는 클럽의 회장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30] 이것은 프로 축구로의 전환과 동시에, 1926년에 바르셀로나의 감독들은 처음으로 프로 축구 클럽을 운영하자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28] 1927년 7월 3일, 클럽은 스페인 대표팀과 폴리노 알칸타라의 두 번째 평가전을 열었다. 이 시합을 시작하기 위해, 지역 기자들과 조종사 조셉 카누다스는 그의 비행기에서 공을 투구 위로 떨어뜨렸다.[31] 1928년 스페인컵 우승은 바르셀로나 골키퍼 프란츠 플라코의 영웅적인 활약에 고무된 라파엘 알베르티가 쓴 '오다 아 플라코(Oda a Platko)'라는 시로 기념되었다.[32] 1929년 6월 23일, 바르셀로나는 첫 번째 스페인 리그에서 우승했다. 우승 1년 후인 1930년 7월 30일, 갬퍼는 개인적인 문제와 재정적인 문제로 인한 우울증 기간을 거쳐 자살했다.[21]
비록 그들이 Josep Escola의 상위에 있는 선수들을 계속 가지고 있었지만, 그 클럽은 이제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이 시기에는 정치적 갈등이 사회 전반에 걸쳐 스포츠에 그늘을 드리웠다.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정치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데 몰두하면서 경기 참석이 줄어들었다.[33] 1930년에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에서 우승했지만, 1931년, 1932년, 1934년, 1936년, 1938년[19]은 전국적인 차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논란 직함을 제외하고).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바르셀로나 출신의 여러 선수들이 운동선수 빌바오 출신 선수들과 함께 군사 봉기에 저항한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했다.[34] 8월 6일 과다라마 근처의 팔랑기 군인들은 친독립 정당 대표인 조셉 선욜 클럽 회장을 살해했다.[35] 그는 바르셀론주의의 순교자로 불렸으며, 그의 살인은 FC 바르셀로나와 카탈로니아의 정체성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36] 1937년 여름, 그 분대는 멕시코와 미국을 순회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제2 스페인 공화국의 대사로 접수되었다. 이 투어는 구단의 재정안정으로 이어졌지만 팀의 절반이 멕시코와 프랑스로 망명을 신청하는 결과를 낳아 나머지 구단의 트로피 경쟁이 더 어려워졌다.[37][38]
1938년 3월 16일, 바르셀로나는 이탈리아 공군의 공중 폭격을 받아 3,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으며, 폭탄 중 하나가 클럽의 사무실을 강타했다.[39][40] 몇 달 후 카탈로니아는 점령당했고, "비균형" 카탈로니아주의의 상징으로 지금은 3,486명으로 줄어든 이 클럽은 여러 가지 제약을 받게 되었다. 언어, 깃발, 그리고 다른 분리주의 징후를 포함한 지역 민족주의의 모든 징조는 스페인 전역에서 금지되었다. 카탈로니아 국기는 금지되었고 그 클럽은 비 스페인식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조치들은 클럽의 이름을 클럽 드 푸트볼 바르셀로나로 바꾸고 카탈로니아 국기를 그 꼭대기에서 제거하도록 강요했다.[41]
1943년 바르셀로나는 코파 델 제너럴리시오(현재의 코파 델 레이) 4강전에서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와 맞붙었다. 레스코트에서의 첫 경기는 바르셀로나가 3-0으로 이겼다. 레알 마드리드는 바르셀로나를 11 대 1로 꺾고 2차전에서 여유 있게 우승했다.[42] 축구 작가 시드 로에 따르면, "[신스] 경기에 대한 언급은 비교적 적었고, 마드리드에서 특별히 축하된 결과는 아니다. 실제로 11 대 1은 바르셀로나 역사상 훨씬 더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마드리드가 독재국가의 팀으로, 바르셀로나가 희생자라는 것을 처음 확인한 경기였다."[43]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탈의실에서 경찰로부터 위협을 받았다는 주장이 현지 언론인 파코 아길러로부터 제기되어 왔으나, 단 한 번도 입증되지 않았다.
어려운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CF 바르셀로나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945년 호세프 사미티에 코치와 세사르, 라말레트, 벨라스코 등의 선수로 활약하면서 1929년 이후 처음으로 라 리가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들은 1948년과 1949년에 두 개의 타이틀을 더 추가했다.[45] 1949년, 그들은 최초의 코파 라티나에서도 우승했다.[46] 1950년 6월 바르셀로나는 클럽에서 중요한 인물이 될 라슬로 쿠발라와 계약했다.[47]
1951년 비오는 일요일, 관중들은 레스코트 경기장을 떠나 산탄데르를 걸어서 2 대 1로 이기고 전차를 타지 않고 프랑수아 당국에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와 동시에 바르셀로나에서는 전차의 파업이 벌어져 블루그라나 팬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벤트는 CF 바르셀로나를 카탈로니아 이상의 대표자로 만들었고 많은 진보적인 스페인 사람들은 이 클럽을 권리와 자유의 확고한 옹호자로 보았다.[48][49]
페르디난드 다우čí크와 라즐로 쿠발라 감독은 1952년 팀을 라 리가, 코파 델 제너럴리시모, 코파 라티나, 코파 에바 두아르테, 코파 마르티니 로시 등 5개의 트로피로 이끌었다. 1953년 이 클럽은 라 리가, 코파 델 제너럴리시모에서 다시 우승했다.
니제즈와 반 가알의 출발은 당시 클럽 부단장이었던 루이스 피고의 출발과 비교했을 때 팬들에게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피고는 사이비 종교의 영웅이 되었고 카탈로니아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영웅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팬들은 피고의 레알 마드리드 입단 결정에 분개했고, 이후 캠프 누를 방문하는 동안 피고는 극도로 적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가 처음 돌아왔을 때, 돼지 머리 한 마리와 위스키 한 병을 군중으로부터 그에게 던졌다.[75] 그 후 3년 동안 클럽이 쇠퇴하고, 경영자들이 왔다 갔다 했다. 반 가알은 2000년 여름 선수들에 대한 광범위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중간 리그 운동과 1라운드 챔피언스 리그 출장을 주관한 로렌초 세라 페러르로 대체되었고, 시즌 후반에 해임되었다. 오랫동안 바르셀로나 팀의 수석 코치였던 카를레스 렉사흐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는데, 처음에는 임시로 임명되었고, 난소 투수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트트릭을 달성한 리발도의 뛰어난 활약을 통해 발렌시아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최소한 그 클럽을 챔피언스리그의 마지막 장소로 이끌 수 있었다.마지막 순간에 얼헤드 자전거 킥 우승자, 예선 획득.
라 리가에서의 더 나은 형태와 챔피언스리그 4강전까지의 좋은 경기에도 불구하고, 렉사흐는 결코 장기적인 해결책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그 여름 반 가알은 감독으로서 두 번째 시즌을 위해 클럽으로 돌아왔다. 이후 챔피언스리그에서 또 다른 멋진 경기에도 불구하고 2003년 2월 15위로 최하위를 기록한 라 리가 구단 역사상 최악의 경기였다. 이로써 반갈은 자신이 관리할 수 있는 최고의 6위 마무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도미르 안티치(Radomir Antich)에 의해 선거운동의 남은 기간 동안 사임하고 교체하게 되었다. 시즌 말에 앤티치의 단기 계약은 갱신되지 않았고, 클럽 회장인 조안 가스파트는 사임했는데, 3년 전에 사장이 된 이후 클럽의 전반적인 운세 하락 외에도 이런 참담한 시즌으로 인해 그의 자리는 완전히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가스파르트 시대의 실망 이후, 새로운 젊은 대통령인 조안 라포르타와 전 네덜란드와 밀라노의 스타였던 젊은 새 매니저 프랭크 리자드가 합류하면서 클럽이 다시 튀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경기장에는 호나우지뉴, 데코, 앙리크 라르손, 루도비치 줄리, 사무엘 에토오, 라파엘 마르케스, 에드가 다비즈 등 세계적인 선수들이 카를스 푸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사비, 비요르 발데 등 국내 성인 스페인 선수들과 어우러져 클럽의 복귀로 이어졌다. 바르셀로나는 2004-05년 라 리가, 슈퍼코파 데 에스파냐가 FIFA 올해의 선수상에서는 호나우지뉴와 에토오가 각각 1위와 3위로 뽑혔다.
2005-06 시즌에 바르셀로나는 그들의 리그와 슈퍼코파의 성공을 반복했다. 리그 시즌의 정점은 레알 마드리드를 3-0으로 이기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도착했다. 이것은 리자카르트의 베르나베우에서의 두 번째 우승으로, 바르셀로나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그곳에서 두 번 우승한 것이다. 호나우지뉴의 활약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바르셀로나의 세 번째 골 이후, 일부 레알 마드리드 팬들은 그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83] 챔피언스리그에서 바르셀로나는 결승전에서 잉글랜드 클럽 아스널을 이겼다. 10명의 아스널에 1 대 0으로 뒤지고 15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은 교체선수 헨리크 라르손과 함께 2 대 1로 승리하며 새뮤얼 에토오와 동료 교체선수인 줄리아노 벨레티의 14년 만의 유럽컵 우승에 대한 목표를 세웠다.[84]
바르셀로나는 우승후보로서 강력한 출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2006-07시즌을 트로피 없이 마쳤다. 시즌 전 미국 투어는 후에 선두 득점자인 에토오와 떠오르는 스타 리오넬 메시를 포함한 주요 선수들에게 연달아 부상을 입힌 것으로 비난을 받았다. 에토오 감독이 공개적으로 리자카드 감독과 호나우지뉴 감독을 비난하면서 공공연한 반목이 있었다.[85] 호나우지뉴도 건강의 부족이 자신의 형태에 영향을 끼쳤다고 인정했다.[86] 라 리가에서는 바르셀로나가 시즌의 대부분을 1위를 차지했지만, 새해의 불일치로 인해 레알 마드리드가 그들을 제치고 챔피언이 되었다. 바르셀로나는 헤타페를 상대로 한 1차전에서 5-2로 승리하며 코파 델 레이 4강전에 진출했으나 메시의 골로 디에고 마라도나의 세기의 목표에 비견될 수 있었지만 4-0으로 패했다. 그들은 2006년 FIFA 클럽 월드컵에 참가했지만, 브라질팀 인터내셔널과의 결승전에서 후반 골로 졌다.[87] 챔피언스리그에서 바르셀로나는 마지막 16강전에서 리버풀의 원정 골로 경기에서 탈락했다
바르셀로나는 2007-08시즌을 라 리가에서 3위로 마쳤고 UEFA 챔피언스 리그와 코파 델 레이의 준결승에 진출했는데, 두 번 모두 결승 챔피언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발렌시아에게 각각 졌다. 레알 마드리드에 4 대 1로 패한 다음 날, 조안 라포르타는 바르셀로나 B의 감독 펩 과르디올라가 2008년 6월 30일에 프랭크 리자카드의 임무를 맡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바르셀로나 B 유소년 감독 펩 과르디올라가 시즌 종료 시 프랭크 리즈카드의 임무를 맡았다.[89] 과르디올라 감독은 바르셀로나 유소년팀 시절 가르쳤던 지금은 유명한 티키타카 스타일의 플레이를 가지고 왔다. 이 과정에서 과르디올라 감독은 호나우지뉴와 데코를 매각하고 사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리오넬 메시를 중심으로 바르셀로나팀 창단을 시작했다.
바샤는 2009년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 애슬레틱 빌바오를 4 대 1로 꺾고 25번째로 우승했다. 3일 후 레알 마드리드와의 역사적인 2-6 승리가 뒤따랐고 바르셀로나는 2008-09 라 리가 챔피언이 되었다. 바르사는 로마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에토오와 메시의 골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2-0으로 꺾고 챔피언스리그 3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시즌을 마무리했고, 스페인 팀이 우승한 최초의 트레블을 완성했다.[91][92][93] 이 팀은 2009년 슈퍼코파 데 에스파냐(Supercopa de España)를 애슬레틱 빌바오[94]와 2009년 UEFA 슈퍼컵에서 샤흐타르 도네츠크(Shaktar Donetsk)를 상대로 우승하였고, 트레블에 이어 국내와 유럽 슈퍼컵에서 모두 우승한 최초의 유럽 클럽이 되었다. 2009년 12월 바르셀로나는 2009 클럽 월드컵에서 우승했다.[96] 바르셀로나는 라 리가 트로피를 99점으로 유지하고 9번째로 슈퍼코파 데 에스파냐를 수상하면서 2010년 스페인 축구에서 두 개의 신기록을 달성했다.[97][98]
2010년 6월 라포르타가 클럽을 탈퇴한 후, 산드로 로셀은 곧 새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번 선거는 6월 13일에 치러졌는데, 그는 총 투표의 61.35%(5만7088표, 기록)를 얻었다.[99] 로셀은 발렌시아에서 다비드 비야를 4000만 유로[100]에, 리버풀에서 하비에르 마세라노와 1900만 유로에 계약했다.[101]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클럽의 라 마시아 유소년 시스템을 졸업한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스페인이 세계 챔피언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7월 11일, 이 학원을 통해 들어온 7명의 선수가 결승전에 참가했는데, 이 중 6명이 경기를 시작한 바르셀로나 선수였으며, 이니에스타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었다.[102]
2010년 11월, 바르셀로나는 엘 클라시코에서 그들의 주요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를 5 대 0으로 물리쳤다. 바르셀로나의 라 마시아는 12월 열린 2010 FIFA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세 명의 발롱도르 최종 후보에 모두 오른 최초의 청소년 아카데미가 되었고, 메시, 이니에스타, 사비는 2010년 세계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다.[103] 바르셀로나는 2010-11시즌에 라 리가 트로피를 보유했는데, 라 리가 트로피를 연속 보유하며 96점으로 마감했다.[104] 2011년 4월, 구단은 발렌시아의 메스탈라 경기장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1-0으로 패하며 코파 델 레이 결승에 진출하였다.[105] 5월, 바르셀로나는 final블리 경기장에서 열린 2011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3-1로 물리치고, 2009년 결승전을 반복하며 4번째 유러피언 컵을 우승했다.[106] 2011년 8월, La Masia 졸업생 Cesc Fàbregas는 아스널로부터 사들였고, 그는 바르셀로나가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스페인 슈퍼럽을 수비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슈퍼컵 우승으로 공식 트로피는 73개로 레알 마드리드의 우승과 일치했다.[107]
같은 달 말에 바르셀로나는 메시와 파브레가스의 골로 포르토를 2-0으로 꺾고 UEFA 슈퍼컵에서 우승했다. 이로써 클럽의 전체 공식 트로피 수는 74개로 늘어나 레알 마드리드의 공식 트로피 총액을 넘어섰다.[108] 슈퍼컵 우승으로 과르디올라 감독은 3년 동안 15번째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며 바르셀로나에서 감독으로 가장 많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바르셀로나는 지난 12월 메시의 2골과 사비와 파브레가스의 골에 힘입어 2011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보유자 산토스를 4-0으로 꺾고 창단 이후 두 번째로 클럽 월드컵에서 우승했다.[110] 그 결과, 과르디올라 통치 기간 동안의 전체 트로피가 더욱 확대되었고, 바르셀로나가 16번째[111][11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말하길, "그들은 너를 그들의 패스로 매혹시킨다,"[13] 그들의 5개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2011년에 그들은 올해의 팀으로 로레우스 세계 스포츠 상을 받았다.[113]
2011-12시즌 바르셀로나는 첼시와의 챔피언스리그 4강전에서 패했다. 최근 전법과 분대 선발로 인해 비난에 직면했던 과르디올라 감독은 6월 30일 감독직에서 물러나 티토 빌라노바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발표했다.[116][117] 과르디올라는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바샤가 3-0으로 승리하면서 임기를 마쳤으며, 그의 지도 하에 바샤가 우승했던 14개의 트로피를 기록하였다.[118]
2012년 여름 바르셀로나의 티토 빌라노바 조감독이 펩 과르디올라로부터 감독을 맡을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그의 임명에 이어 바르셀로나는 그들이 시즌 내내 리그 테이블에서 1위를 차지하며 2패 100점을 올리는 것을 보는 믿을 수 없는 경기를 펼쳤다. 그들의 최고 득점자는 두 번의 해트트릭을 포함해 라 리가에서 46골을 넣은 리오넬 메시였다. 2013년 5월 11일, 바르셀로나는 22번째로 스페인 축구 챔피언으로 선정되었으며, 여전히 4경기를 남겨두고 있다. 결국 바르셀로나는 3월 초에 그들에게 2 대 1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에 15점 차로 뒤진 채 시즌을 마감했다.[119] 그들은 각각 레알 마드리드와 바이에른 뮌헨으로 나가 코파 델 레이와 챔피언스 리그의 준결승 무대를 밟았다. 7월 19일, 빌라노바가 목암이 돌아왔기 때문에 바르셀로나 감독직을 사임한다는 발표가 있었고, 2012년 12월 3개월간의 병가를 내고 두 번째로 치료를 받게 된다.
바르셀로나 서포터스의 별명은 첫 경기장인 캠프 데 라 인두스트리아의 관중들이 관중석 위로 컬을 들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카탈로니아인 바크(영어: arse)에서 유래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인구의 약 25%가 바르사 동조자로, 인구의 32%가 지원하는 레알 마드리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147] 유럽 전역에서 바르셀로나는 가장 선호하는 2차 선택 클럽이다.[148] 구단의 회원 수는 2003-04 시즌 10만 명에서 2009년 9월 17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는데, 이는 호나우지뉴와 당시 대통령이 스페인 및 영국 온라인 매체에 집중한 미디어 전략 덕분이다.[150][151]
2015년 현재 전 세계에는 회원 가입 외에도 페니스(Penyes)라고 불리는 공식 등록된 팬클럽이 1267개 있다.[152] 팬클럽은 바르셀로나를 현지에서 홍보하고 바르셀로나를 방문할 때 유익한 제안을 받는다.[153] 세계 최고의 지원을 받는 팀 중 바르셀로나는 2017년 12월 현재 레알 마드리드에 이어 스포츠 팀 중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소셜 미디어를 보유하고 있다.[9][154] 명예회원이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스페인의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전 총리 등 지지자들 사이에 저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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